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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14:10 국내성지 사진순례

나무골 성지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로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이며

 

 

 

박해 시대의 교우촌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대구 성당의 첫 본당터이자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와 성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성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회장 등 역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전교 회장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전교하였고,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 포교 활동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가정이 마을 사람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 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860년 경상도 지방 박해 때 이곳에서 한티로 피난하여 순교한 이선이(李先伊, ?~1861, 엘리사벳)와 그의 장남 배도령( ?~1861, 스테파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30여 명이 현지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신나무골 학당은 이 지역에서 신학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외국의 학문을 가르친 학당이었다.

 

 

 

 

 


사제관 축복 미사 2012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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