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황새바위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를 낸 거룩한 땅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를 낸 거룩한 땅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등 10여 명의 회장들을 비롯하여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은 신자들이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공주에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監營)과 토포사(討捕使, 鎭營將)가 관할하는 진영(鎭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왔으며, 신자들은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10여 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고, 최 연장자는 남상교(南尙敎, 1783~1866,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 계층도 다양하였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 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황새바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황새바위 성지 (041) 854-6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