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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지 사진순례'에 해당되는 글 49

  1. 2012.11.08 강경 나바위 성지
  2. 2012.09.03 대구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
  3. 2012.09.03 대구 성모당
  4. 2012.09.03 한티 피정의 집
  5. 2012.09.03 신나무골 성지
2012. 11. 8. 23:31 국내성지 사진순례

 

  • ▒ 나바위 성당 화산 천주교회의 초창기 명칭.

  •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는 “화산”이라는 산이 있다.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 준 이름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나바위)가 있는데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897년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華山里) 나바위[羅岩] 부락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 농민 운동 때 망해 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나바위는 옛날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순교비와 망금정 화산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 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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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14:45 국내성지 사진순례

 

계산 주교좌 대성당

 

사적 제290호의 경상도 지역 최초의 본당

 

 

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3년 당시 남산동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다. 경상도 지역 성당이 설립된 것은 개항 직후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 신나무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성당’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성당의 전신이다.

 

 

1897년 현재의 계산동 성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 같은 해 성탄 첨례 날에 거행하였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훗날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동 성당 사적 제290호. 1918년의 증축으로 완성을 본 이 건물은 도심의 평지에 건축된 연건평 3백 평 규모의 벽돌조 건물로, 전주 전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1899년 건축된 목조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1900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金保祿) 신부가 설계하고 프랑스·중국 등지에서 건축 기술자와 도목수·석공 등 30여 명을 초빙, 2년 여 만에 완공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 삼랑식(三廊式)으로 신자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입면은 서쪽 정면에 종탑(鐘塔) 기능의 2개의 8각형 첨탑을 세워 건축물의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은 부벽(扶壁) 구조에 아치로 설계하였으며, 정면 현관과 측랑(側廊) 위쪽에 있는 꽃무늬 창은 한국의 건축 양식상 획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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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14:31 국내성지 사진순례

대구 성모당

대구교구 창설시 성모님께 감사 증거로 남기고자 만든 동굴

 

 

성모당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건물이다.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가능한 한 루르드 성모 동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흡사하게 하였다. 성모당은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배치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평면은 우측면의 뒤쪽이 안쪽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장방형으로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상을 봉안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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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14:20 국내성지 사진순례

한티 순교성지 소개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漆谷)군 동명(東明)면 득명(得明)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미터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한티피정의 집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한티 십가가의 길 중에서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891미터)에서 가산(901미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미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른아침 성모님 앞에서 기도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한티피정의 집 대성전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한티의 갈대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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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골 성지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로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이며

 

 

 

박해 시대의 교우촌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대구 성당의 첫 본당터이자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와 성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성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회장 등 역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전교 회장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전교하였고,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 포교 활동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가정이 마을 사람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 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860년 경상도 지방 박해 때 이곳에서 한티로 피난하여 순교한 이선이(李先伊, ?~1861, 엘리사벳)와 그의 장남 배도령( ?~1861, 스테파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30여 명이 현지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신나무골 학당은 이 지역에서 신학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외국의 학문을 가르친 학당이었다.

 

 

 

 

 


사제관 축복 미사 2012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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