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 지 순 례
Ⅰ. 순례자의 자세 (고려/조선시내)
Ⅱ.동방의 사도 ( 예수회의 창설자중 한분 인도-일본-중국)
(스페인 출신의 출/1506,사제/1537 시몬 로드리게스,
선교 인도 고아, 일본, 중국에서 사망)
Ⅲ.이 땅에 최초로 입국한 신부 : 임진왜란/포르투칼 세스페데스 군종신부
부산지역 6개월
Ⅳ.한국 가톨릭의 시작 :동지사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님으로 부터 세례 베드로..
Ⅴ.한국 가톨릭의 6대박해
1. 을사 추조적발 사건 (乙巳 秋曹摘發 事件) 정조9년 서기 1785년
(김범우(토마스) 첫번째 순교자1785) 추조: 관아에 낮은 벼슬아치
2. 신해박해 (辛亥迫害) 정조15년 서기 1791년 (최초 국가적박해)
(전주 진산사건:윤지충,권상연 순교) 최초로 피의 순교자로서 가톨릭 국가적
박해의 시작
(주문모 신부입국:1784년 입구 1785 부활 대축일 미사 봉헌) 황사영 정난주 주례
3. 신유박해 (辛酉迫害) 순조1년 서기 1801년 (최초 전국적 박해)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 (토사교문) 정순왕후 김대비의 수렴정치,홍봉한
(오가작통법 ,주문모 정약종 초대교회 지도자 순교 와 300 여명 순교)
4. 기해박해 (己亥迫害) 헌종5년 서기 1839년 (순원왕후, 이정희, 성직자3분, 정하상, 유진길의 참수)
5. 병오박해 (丙午迫害) 헌종12년 서기 1846년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6. 병인박해 (丙寅迫害) 고종3년 서기 1866년 (흥선대원군, 병인양요,8천-2만여명 순교) 선참후계(先斬後啓) |
숙종의 /영조 |
사 도 세 자 | |
정조1..2. | |
순조 3. | |
헌종 4.5 | |
철종 박해가적음 | |
고종 6. |
< 4대박해 >
1. 신유박해 (辛酉迫害) 순조1년 1801년.
2. 기해박해 (己亥迫害) 헌종5년 1839년.
3. 병오박해 (丙午迫害) 헌종12년 1846년.
4. 병인박해 (丙寅迫害) 고종3년 1866년.
영 조 |
주요사건 |
탕평책 |
사도세자 |
임오사건, 홍봉한 ,김구주 (흑산도유배) | |
정 조 |
을사추조 적발사건 신해박해 주문모 신부 입국 |
황사영,강완숙,동정부부,정약종,백정 황일광 알렉시스 1800년 6월 28일 정조 제위 24년만에 승하... |
순조/11살 정순왕후 |
신유박해 1807 1월10일 박해령 바포 |
김대비,오가작동법,주문모신부,권철신,이가환,정약종 동정부부 황사영, 강완숙 ,이경도(가를로)........ |
헌종8살 헌종5년/12년 |
기해박해 병오박해 |
앵베르주교,모방 샤스땅 신부 김대건 신부,현석문 가를로 |
철종 |
은언군의 (강화도령) | |
고종 |
병인 대 박해 선참후계(先斬後啓) |
홍선 대원군 이하응/ 베르뇌 주교.... 먼저 참하고 후에 천주교인이라 보고하는... |
◆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는 한국 교회가 창설(1784년 11월경)된 지 약 반년만인 1785년 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수감되었다가 장형을 당하고 도배(徒配)되었다. 그 후 한국교회는 4대 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1791년), 을묘(1795년), 을해(1815년), 정해(1827년), 경신(1860년)박해 등이 잇달았다. 이중에서 4대 박해는 이른바 조정의 공식적 개입에 의하여 야기되었으나, 기타 박해는 조정의 공식적인 지시 없이, 포도대장이나 일부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박해를 지시하여 비롯된 점에서 구분된다.
○ 신유박해(1801)
정조의 뒤를 이은 11세의 순조 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攝政,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1801년) 1월 11일(음)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세금, 치안 등에서 조정의 통제력을 강화하던 제도)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李家煥, 호 錦帶, 貞軒, 1742~1801)과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은 장살당하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과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 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하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1761~1801, 골룸바)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는 군문효수 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체포되어 대역 부도죄(大逆不道罪)로 순교하였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는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 기해박해(1839)
1839년 헌종 5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邪學, 사악한 배움이란 뜻으로 박해자들이 천주교 등을 비판하여 부른 말)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南明赫, 1802~1839, 다미아노)과 궁녀 박희순(朴喜順, 1801~1839, 루치아)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조신철(趙信喆,1795~1839, 가롤로) 등 한국 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과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밖에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을 참고하면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순교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병오박해(1846)
헌종 12년(1846년)에 정부는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이 비교적 안전한 해로(海路)를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登山鎭)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6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玄錫文, 1797~1846, 가롤로) 등 남녀 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 병인박해(1866)
고종 3년(1866년)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 호 石坡) 치하에서 한국 교회사상 최대의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다.
이 박해의 배경이 되는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 왔고, 이어 승지인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만나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 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를 맞은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조선 사신이 보내온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천주교 금령(박해령)이 내려졌다는 서신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1866년부터 1873년 전후까지 광의의 병인박해 기간에 약8천 명에 달하는 교우의 생명을 앗아갔다.
대구교구 한티성지
박해 때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이며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
또한 이곳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 가롤로, 최 바르바라, 조아기, 서태순 베드로의 묘와 무명 순교자의 묘 30여 기가 있는 한국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하다.
한티 마을은 대구 천주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과 함께 대구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 시대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깊은 산중 취락이었다.
한티에 천주교 신자 취락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1830년대 교우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피난지였다
한티 교우촌의 개척자로는 볼 수 없으나 한티를 오늘의 유명한 교회 유적지로 만든 이는 김현상 요아킴이다.
서울 관철동에 살다가 1837년 낙향하여 처음에는 신나무골에서 살다가 1838∼1839년 무렵 한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가 발생하기 몇 년 전에는 상주 구두실 출신인 조 가롤로 가정, 1
865년에는 대구의 이 알로이시오 가정,
1866년에는 서익순(인순) 요한과 서철순 바오로 가정 등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척박한 한티에서 옹기,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한티 교우촌에는 박해 기간 동안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신자들이 적지 않다. 1861년경 상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칠곡 신나무골에 살던 이선이 엘리사벳 가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이선이와 큰아들 배 스테파노가 포졸들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들 모자가 한티의 첫 순교자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에 걸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 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 가롤로를 비롯하여 부인 최 바르바라, 여동생 조아기 등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너무 많은 시신이 썩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 한티 성지 순교자들 한티 순교 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이중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지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 조 가롤로(공소 회장)
○ 최 바르바라(조 가롤로의 부인)
○ 조아기(조 가롤로의 누이동생)
○ 서태순 베드로
한티 순교성지 소개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漆谷)군 동명(東明)면 득명(得明)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미터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891미터)에서 가산(901미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미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하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신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채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묘비가 세워진 대구 날뫼 출신 서태순, 이 공사가 등과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의 옹기골에 숨어들었던 배손의 일가족, 조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티 마을 입구 송림사 앞쪽에는 대구 대교구가 운영하는 '성가 양로원'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 걸어서 한티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1983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다. 대구 시내에서 이곳 피정의 집까지는 포장 도로를 말끔하게 닦아 두었고 팔공사 관광 도로가 바로 한티를 지난다.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연화(蓮花)동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2호(2000년 1월호), pp.90-91]
신 나무골 성지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로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이며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대구 성당의 첫 본당터이자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와 성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성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회장 등 역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전교 회장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전교하였고,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 포교 활동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가정이 마을 사람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 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860년 경상도 지방 박해 때 이곳에서 한티로 피난하여 순교한 이선이(李先伊, ?~1861, 엘리사벳)와 그의 장남 배도령( ?~1861, 스테파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30여 명이 현지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는 1885년 11월경부터 1887년 3월까지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의 새방골[新坊谷]로 옮겨 대구 본당을 창설하였고,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신부,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1868~1903, 가밀로) 신부도 이곳에 머물다가 각 지역 본당을 창설하였다. 따라서 신나무골은 대구, 가실, 전주, 부산 본당의 산실로서, 특히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이 학당에서는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한문을 포함한 천주교 교리와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이 지역에서 신학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외국의 학문을 가르친 학당이었다. ▒ 연화 서당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2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한학교(인현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 중의 하나였다.
낙산 가실성당
병인박해 후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활동 중심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새로운 신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 하나가 신나무골이다. 그리고 병인박해가 끝난 후 성직자들은 신나무골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4년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1868~1903, 가밀로) 신부가 입국하였고, 그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95년 왜관읍 낙산동 가실에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실 성당이다.
그 후 가실 성당은 여러 차례의 본당 분할을 하며 경상도 지역의 신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실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성당에 이은 두 번째라는 오랜 연륜을 지녔다. 대구 첫 본당인 계산 성당의 전신인 칠곡 신나무골 연화 학당처럼, 가실 성당에도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던 학당이 있었고, 한국 천주교회사의 영광과 아픔을 한 몸에 품고 있다. 가실 성당은 원래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터 일대다.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간 성순교는 홀로 남아서 세계 일주를 하였는데, 이스라엘까지 다녀왔다는 행장이 남아 있다. 성순교는 경신박해(1859~1860년)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 갔다가, 그 이름처럼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하였다. 상주로 옮겨 가기 전에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기고 갔는데, 주인이 순교하자 집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당시 경상도 지방 선교 책임자로 부임한 파이야스 하경조(河敬朝) 신부는 가실에 살던 성순교의 정신도 살리고, 선교를 할 본당으로 삼을 만한 집도 필요하던 터라 천주교에서 사들였다. 이렇게 성순교가 살던 기와집은 첫 가실 성당 본당이 되었다. 그래서 성순교 가문의 유적비가 성당 정면에 들어서 있다. 가실 본당의 현재 건물은 1922~1924년에 지어진 고딕식 벽돌조 건물로, 설계는 서울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은 물론 1896~1925년까지 30년간 한국 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 건축물을 설계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리노) 신부가 담당했다.
가실 성당은 깊이 들여다보면 성당 곳곳에서 40가지 성경 말씀을 체험할 수 있다.성당 내 10개의 큰 창문에 있는 색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창문마다 4개의 주제가 있는데,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보면 된다. 일곱 번째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되어 있다. 오르간 뒤에 있는 첫 번째 창문에는 성모영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예수탄생, 삼왕경배가 그려져있고, 여덟 번째 창문은 최후의 만찬, 게세마니에서의 기도, 빌라도의 사형언도, 십자가의 죽음이 담겨있다. 사형언도를 받은 예수의 표정이 비굴하거나 처참하지 않고 참으로 당당하고 담담하다. 눈표정도 그분의 지혜를 담듯이 깊이가 있어서 참 좋다. 성 안나상 옆에 있는 마지막 열 번째 창문에는 호숫가에 나타난 예수,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 승천, 성령 강림을 전하고 있다. 3개의 출입문 쪽 위쪽에 있는 반달형 창문 색유리화는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비유’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종탑의 3개 원형 창문에는 하느님의 신비를 뜻하는 은총의 옥좌, 재림예수, 삼위일체를 보여준다.
지금은 전시실로 쓰이는 단층 건물(구 사제관)은 한국천주교회사로 보나 대구천주교회사로 보나 보물 창고이다. 선교사들이 직접 미사주를 채즙하던 포도 착즙기, 밍크본이란 화가가 1930년대에 그린 43장의 성서그림, 성체를 만들던 숯 제빵기, 100년도 더 된 교적, 요리문답서, 역대 본당신부 사진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구 성모당
대구교구 창설시 성모님께 감사 증거로 남기고자 만든 동굴
성모당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건물이다.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가능한 한 루르드 성모 동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흡사하게 하였다. 성모당은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배치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평면은 우측면의 뒤쪽이 안쪽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장방형으로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상을 봉안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하고,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후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 동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 蘇世德, 1877~1921, 요셉) 신부가 중병으로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고,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 동굴 정지 작업 공사가 시작되었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님께 허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 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드망즈(Demange) 주교 드망즈(1875~1938, 安世華) 주교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189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1899년에 부산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 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대목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신설된 대구대목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 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 전교에 힘쓰다가 6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루르드(Lourdes)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이 기간 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 위에서 14세 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Soubirous)[1933년 12월 8일 성녀 베르나데트로 시성]에게 발현하였다. 마지막 발현 때 성모는 자신을 일컬어 “원죄 없는 잉태”라고 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1854년) 교회의 교도권은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신앙을 교의로 선포한 바 있었다. 발현이 있었던 자리에 샘물이 솟아났으며 이 샘물로 목욕하거나 이곳에서 성체 강복예절을 할 때 질병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적적인 회개와 은총을 체험하는 등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교회는 1862년 이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발현하신 성모의 요청에 따라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은 남 프랑스의 가장 웅장한 성당의 하나가 되어 있으며 루르드는 유명한 성지가 되어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이 발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1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고(2월 11일)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전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유스티노 신학교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1911년 조선교구(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드망즈 주교가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5월 27일 신학생 58명으로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다. 초대 교장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였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스테파노) 신부가 취임했고, 교육 과정은 중등과 철학과 신학과 등 12년제의 학교였다.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의 노력으로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朱在用, 1894~1975, 바오로) 등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8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 신부가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대구,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완공한 붉은 벽돌로 된 2층 신학교 건물로 서울 명동 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리노) 신부가 건립 계획을 세웠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한다. 이 건물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 건축 양식과 함께 벽돌 제조 및 조적기술을 대구 부민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풍에 준하는 비교적 순수한 서구식 건물로 벽돌의 조적이 정교한 우수한 건물이다.
학교는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있는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며 1층 전면에는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연속 아치로 툇간을 설치하여 복도로 사용하였다. 현재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 부분은 철거되고 중심 부분만 남아 있다. ▒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12년 드망즈 신부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서울 명동 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건립 계획을 세웠다.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자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 건축 양식과 함께 벽돌 제조 및 조적 기술을 대구민에게 소개한 의의를 가지며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 프와넬(Poisnel) 부주교 프와넬(1855~1925, 朴道行) 신부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서 태어났다.1881년 8월 3일 한국으로 떠났으나 곧장 한국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기착하였다. 그는 때마침 한국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 간호를 하다가 나중에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였다. 첫 포교지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뮈텔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 일을 맡아보게 되면서부터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종현(오늘의 명동) 주임 신부로 있을 때 종현(鐘峴) 대성당의 건축을 맡고 있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오늘날 누구나 감탄하는 대성당을 완공시켰다. 그 후 30년 동안 모든 성당과 기타 부속건물을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하였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대구 관덕정 순교자 기념관
수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 터에 세운 순교자 기념관
아미산 줄기에 위치한 이곳 관덕정은 본래 대구읍성의 남문 밖으로, 조선 후기에는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그 한쪽은 이전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49년 관찰사 민백상이 이곳에 시험장인 도시청(都試廳)을 건립하고 관덕당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 부터이다. 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호 水雲, 1824~1864)가 처형된 유서 깊은 곳이다.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을해박해 때 7명, 정해년에 잡혀 사형 언도를 받고도 집행이 안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해년에 참수 치명한 3명, 병인박해 때 4명 등 14명이며,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 26명, 정해박해 때 3명, 병인박해 때 1명 등 30명이다. 그리하여 대구 감영 옥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44명에 이른다.이곳 순교자들 가운데서 1867년 군문효수형을 받은 이윤일(일명 제헌, 1823~1867,요한)은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지하 경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중앙 제대와 감실 십자고상, 그리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초상화가 있다. 지하 경당 안 오른쪽에 위치한 성인 유해실에 모신 제대는 1902년 대구 본당(현 계산 주교좌 본당) 신자들이 고딕식 성당을 짓고 봉헌한 첫 제대인데, 이 제대는 관덕정으로 옮겨졌다. 이 제대에는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모셔진 유해들이다. 지하 경당에 있는 성인 유해실 제대에는 18명 성인의 유해와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명 성인 유해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도 바오로 등이며, 18명 복자의 유해로는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원 복자들이다.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18명 성인의 유해, 18명 복자의 유해까지 총 3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거룩한 순교 성지다. ◆ 순교 기념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경당 축복 및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이 있었고, 5월 31일 개관을 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신 이윤일(요한) 성인을 찬미하고 기념하고자 건립된 것이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이다.이 기념관 건립사업은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지개발의 첫 사업으로 시행된 것이다. 건물 모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단청 무늬 색체로 된 누각이며 건물벽은 근세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축조된 보루와 같이 네모로 된 구멍이 있고 건물 바깥벽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돋음새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지하층에 경당이 있고 경당을 향하여 오른편에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제대와 영정이 모셔진 유해실이 있다. 경당 맞은편엔 제1전시장 있는데, 여기엔 대구대교구의 발전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 로비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그림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바닥에는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와 조선조 형구인 황새바위가 놓여 있다. 지상 2층에는 제2전시장이 있다. 지상 3층은 제3전시장과 누각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이윤일(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잘 묘사하고 있으며 드망즈 주교와 서정길 주교의 유품이 있고, 한역서학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책이 있다.
순교자
◆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어려움도 잘 이겨내도록 빌어 주소서.
◆ 고성대 베드로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고성대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성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1815년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고성운 요셉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고성운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래 성격이 착하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고, 형제끼리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었다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모두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구성열 바르바라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 바르바라는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그 후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배교할 마음이 있어 보이자 그녀의 사위인 프란치스코의 권면 덕택에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았다. 17개월이 넘게 옥중 생활을 하였고, 그 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약 40세였다.
◆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년) <하느님의 종 124위>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 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그의 큰아버지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다. 대구로 압송되어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년) <하느님의 종 124위>박사의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다.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자 관장은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년) <하느님의 종 124위>이재행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래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로 은거해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면서 격려하였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증거하였다. 대구로 이송되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안드레아)과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이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재행 안드레아의 나이는 64세였다.
◆ 김화춘 야고보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김화춘 야고보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그는 기도 생활과 성서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할 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고, 고성대(베드로) 형제, 구성열(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 이시임 안나 (1782∼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 안나는, 나이가 들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요한)는 그녀의 오빠였다.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뱃사공은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몇 해 안되어 남편이 사망하였고, 어린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1815년에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약 1년 6개월이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 김종한 안드레아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4위>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가 되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맏형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이 일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나갈 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계산동 주교좌 성당
사적 제290호의 경상도 지역 최초의 본당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3년 당시 남산동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다.
경상도 지역 성당이 설립된 것은 개항 직후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 신나무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성당’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성당의 전신이다. 1897년 현재의 계산동 성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 같은 해 성탄 첨례 날에 거행하였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훗날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 계산동 성당
사적 제290호. 1918년의 증축으로 완성을 본 이 건물은 도심의 평지에 건축된 연건평 3백 평 규모의 벽돌조 건물로, 전주 전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1899년 건축된 목조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1900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金保祿) 신부가 설계하고 프랑스·중국 등지에서 건축 기술자와 도목수·석공 등 30여 명을 초빙, 2년 여 만에 완공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 삼랑식(三廊式)으로 신자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입면은 서쪽 정면에 종탑(鐘塔) 기능의 2개의 8각형 첨탑을 세워 건축물의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은 부벽(扶壁) 구조에 아치로 설계하였으며, 정면 현관과 측랑(側廊) 위쪽에 있는 꽃무늬 창은 한국의 건축 양식상 획기적인 것이다.
▒ 김보록(Robert) 신부 로베르(1863~1922, 바오로)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원으로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엉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 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 후 대구에서 30년간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 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순교의 오영환 라우렌시오 교수님 책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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