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활동
이렇듯 박해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도 국내에서 각종 교리서의 번역 보급과 함께 한불자전 등의 편찬사업이 진행되어 1880년과 1881년에 걸쳐 간행됨으로써 한국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1874년에 파리에서 간행됨으로써 한국 교회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2년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제7대 대목으로 임명된 블랑(Blunc)주교는 종현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의 건립을 위한 대지를 매수하는 등 교회 재건에 힘썼다.
▶서울대목구
이어 1890년 제8대 대목으로 뮈텔(Mutel) 주교가 임명되어 1898년에 명동대성당의 축성식을 갖게 됨을 계기로, 여러 곳에 성당이 건립되어 전교사업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11년에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개칭되어 충청도 이북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뮈텔 주교가 계속 서을 대목구를 맡아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해서교안 등 적고 큰 교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교세는 날로 신장되어 전교 구역은 멀리 제주도와 간도에까지 뻗어 나갔다.
이에 1920년에 원산대목구가 분리되어 함경도와 간도지방의 전교사업은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또회에 위촉하였고 1927년에는 서울대목구 안에 평양지목구를 독립시켜 미국 메리놀회에 위임하였다.
그리고 장차 한국인 교구 설정을 준비하고자 황해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였다. 교세가 날로 성해지는 가운데 1925년 7월5일에 로마 교황청에서 기해 박해와 병오 박해 때 순교한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조선교회는 다시 없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1933년 뮈텔 주교가 선종하고 라리보(Larribeau)주교가 9대 대목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고, 1942년 초 제10 대목으로 노기남 신부가 첫 한국인 주교로 성성되어 취임함으로써 비로소 서울대목구의 자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노기남 주교는 일제 말기의 여러 가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평양지목구와 춘천 지목구장을 겸임하면서 난국을 타개하여 서울대목구를 지켜 왔다.
▶광복후의 성장
1945년 광복이 되자 노 대주교는 전국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고유(告諭)하여 교회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6.25전쟁으로 다시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신자를 잃는 비극을 초래하였으나 휴전과 더불어 노주교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여 원조를 청해다가 조국 재건과 교회 복구에 노력해 온 결과 1962년 3월 10일에는 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서울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됨에 노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67년 노대주교가 은퇴하고 윤공희 대주교가 교구장 서리도 임명되었으나 곧 이어 1968년 4월 9일에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6일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병인 박해로 순교한 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영광을 만방에 빛나게 했으며, 1969년 3월에는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한국교회의 영광을 더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