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 순교성지 소개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漆谷)군 동명(東明)면 득명(得明)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미터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한티피정의 집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한티 십가가의 길 중에서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891미터)에서 가산(901미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미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른아침 성모님 앞에서 기도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한티피정의 집 대성전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한티의 갈대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